※ 1991년 대한신경정신의학회에서 기획한 원로탐방의 하나로 한국정신치료학회 회원이기도 하셨던, 작고하신 고 김행숙 대한신경정신의학회 회원이 이동식 선생님과 대담한 내용으로 (‘원로와의 대화’ 1991 대한신경정신의학회(하나의학사) pp.133-160), 2004년 8월 이동식선생님께서 교정을 보신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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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에 고희를 맞은 소암 이동식 선생님을 성북동 자택으로 찾아간 것은 새해 첫 일요일인 지난 1월 6일 오후, 마침 사모님인 김동순 선생님은 중요한 약속 때문에 집을 비우신 때라 2층 서재에서 선생님께서 손수 끓여주신 향긋한 차를 마시며 까마득하게 우러러 뵙던 선생님을 탐방한다는 일을 추진하면서부터 생긴 긴장감이 어느새 풀려나갔다. ‘선생님과 같이 있는 것 자체가 치료’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지만 선생님에게서 방문자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분위기를 이 날도 느낄 수 있었다.
평소 ‘도가 정신치료의 궁극적 형태’라고 말씀하시는 선생님은 누가 봐도 ‘도’의 ‘권위자’로 비춰지지만 스스로는 ‘권위자’라는 것은 없다고 강조하신다. 사람이 권위가 아니고 진리가 권위이며 따라서 진리를 추구하기보다 ‘권위자’가 되겠다는 사람은 이미 권위에 굴복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내가 확신하게 되면 부처가 한 말이든 공자가 한 말이든 프로이드가 한 말이든 그것은 그때부터 내 말이 된 것이야. 진리는 개인의 소유가 아니야. 깨달은 사람은 꼭 같은 거야.”
선생님은 또 투사를 없애는 것이 도나 정신치료의 핵심이라고 말씀하면서 자기집착이 망상을 만들어내므로 우선 자기집착부터 끊어야 하며, ‘자기 자신을 깨닫는 것이, 즉 자기반성이 도며, 정신건강은 반성능력이다.’라고 강조하셨다.
1941년 대구의전을 졸업하고 스스로도 ‘의사를 한다면 정신과 밖에 할 것이 없다’고 생각 했던 데다 선배의 권고도 있어 이듬해 경성제대 신경정신과 의국에 들어간 선생님은 독일 사람이 쓴 정신치료 책을 읽고, 히스테리 환자 2명에게 최면을 걸어 치료를 하셨다. 1950년 같은 의국에 근무하던 김동순 선생님과 결혼하신 뒤 선생님은 1954년 미국에 건너가 많은 임상경험을 쌓게 되었다.
“당시 어떤 후배의사가 미국에는 도둑이 없다는 등 온갖 예찬을 하더군. 길가에 쌓아 놓은 신문을 한 장씩 집어 들고 가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도 들었을 거야. 그 후배를 2년 뒤 귀국 길에 볼티모아에서 만났는데 도둑맞은 이야기를 하더군. 미국에 범죄가 얼마나 많은가는 내가 미국 갔을 때 미국인 동료의사의 첫마디가 도둑조심 하라는 말이었던 것으로도 바로 알 수 있었지. 그런데 이 후배는 당시 어렵던 미국행을 위해 애쓰는 사이 미국을 미화하는 망상을 형성하게 됐던거야. 그러니 미국사회가 잘 안보였던 거야.”
서양문화에 대한 선생님의 평가는 1958년 유럽으로 건너가 4개의 국제학회에 참석한 뒤 확실해졌다.
“학회 네 곳에 참석해보고 서양 사람들이 신통치 않다고 생각했지. 동양에서는 개인의 양심에 맡기는 일도 미국에서는 규칙이나 법률에 저촉되느냐 않느냐를 따지더군, 우리는 보통 상식적으로 아는 일도 그들은 심각하게 철학적 해석을 하고...”
선생님께서 ‘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미국서 연구를 마치고 귀국하여 한 역경위원을 치료하던 중 ‘도’는 정신치료이고 집착을 없애는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되면서부터 였던 것 같다. 그 뒤 1968년 동양에서 카운슬링 철학이 없으니 카운슬링도 서양이론을 가져와야 된다는 식의 생각에 쐐기를 박기 위해 ‘한국에 있어서 정신치료 카운슬링의 철학적 정초(서설)’를 숙대 총장 윤태림 박사의 회갑기념 논문집에 쓴 것이 ‘도’에 관한 첫 논문이었다. 1970년에 한국철학회에서 하신 ‘도의 현대적 의의’라는 강연에서 ‘도’를 본격적으로 다루셨다. 지금은 ‘도’가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져 미국, 유럽등지와의 교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현재 세계의 정신치료를 통합한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러한 일들은 나 혼자 힘으로는 안되지만 내가 없으면 어려운 것도 사실이야”라고 말하셨다.
1946년 신경정신의학회 창립에 참여, 65년에는 회장을 역임하셨고, 현재 정신치료학회, 팔공정신의학회 등, 국내외의 여러 학회활동을 통해 후진들을 적극 지도하시며, 김동순 선생님과 함께 동북의원을 운영하신다.
선생님은 학회활동에 대한 ‘열린 입장’을 갖고 계셨다. “신경정신의학회 주변에 각종 학회와 써클이 많을수록 정신의학이 전체로서 발전할 수 있어. 노는 서클도 좋고 공부하는 서클도 좋아. 이견을 두려워할 것도 없어. 이견이 많다는 것은 구성원들이 그만큼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는 뜻이야.”
누구를 찾는 아버님의 목소리가 들리자 아래층으로 내려가 무엇인가 차근차근 설명해 드리고 다시 올라오신 선생님을 많은 별명 중 어떤 별명을 듣기를 좋아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어떤 별명을 듣기 좋아한다면 그게 바로 집착이야”라고 웃어 넘기셨다.
“집착을 버려야 된다”는 선생님의 평소 말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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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과로 시작한 의사생활 - |
김행숙 |
대한신경정신의학회에서 진행하고 있는 원로탐방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지난해 고희 기념 학술대회에서 인간의 불행이란 감정처리를 잘 못하는 데서 오고 감정처리를 잘 하는 데서 행복이 온다는 것을 어릴 때에 깨달았으며, 진실과 위선에 대해서 예민하게 지각하셨고, 이웃 어른들로부터 인생을 환히 안다, 중 같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정신치료 대가로서의 싹이 어릴 때부터 이미 보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정신과의사로서의 길을 택하게 된 것은 이러한 어릴 때부터의 관심이 자연스럽게 연결된 결과였습니까? 아니면 다른 특별한 동기가 있으셨는지요. |
이동식 |
아니, 뭐... 원래는 내가 대구고보를 다니다가 청주고보(1938년 졸업)로 가서 영어선생이 일본사람인데 잘 가르치는 사람이었어. 3학년 때... 그 사람은... 대학을 안 나오고 상선 타고 다니다 거기서 영어를 배웠지. 저학년 영어를 잘 가르쳤다고. 그러니까 대구고보선 내가 공부를 통 안했는데 그 선생 시간은 공부를 하니까 영어를 딴 사람보다 잘 하고 밤낮 모의시험에서 상 받았지.
4학년에 올라가서 배운 영어선생은 고등사범학교 부설 영어교원양성소 나온 일본사람인데 그도 아주 공부를 많이 해 고등교원검정시험도 패스했지. 고등교원은 요새 같으면 전문학교, 대학 이상이지. 그러니 뭐 물으면 다 대답을 해주고, 그러니까 내가 영어를 아주 잘 했다구. 그래서 어느 학을 할까. 내가 늘 모의시험은 일등 했지만 가정형편은 일본 학비 대기가 어렵고.
그래 가지고 대구의전이면 왜관에서 기차 통학할 수 있겠다 싶어 거기 입학원서를 내놨는데 막바지에 가서 연령 미달로 말이야 시험 자격이 없다 이렇게 됐거든. 그래서 1년 재수한다고 말이지. 원서를 사고는 좋다고 이렇게 있는데 교장 선생님이 학교 사환을 보내 학교 성적이 너무 좋아 아깝다면서 서울대의 이공학부 전신인 경성고등공업학교는 며칠 남았으니 학비 같은 건 자기가 장학금을 해주겠다며 권했는데 우리 아버지는 이공계통은 한국 사람은 통과해도 소용없다고 가지 말라고 해서 안갔어.
그래서 우리 삼촌이 일본산파 증명서를 내어 내 나이를 한 살 올려 가지고 마감 직전에 대구의전에 갔는데 18살에 거 뭐 시체해부다 영 재미가 없단 말야. 그때 부총리 지낸 김준성이도 같이 들어갔어. 그는 시체해부 하다가 도저히 안되겠다고 재수해 가지고 다음 해 경성대 들어갔거든. 그러니까 영어, 독일어는 잘 했겠지. 그래서 나도 어떻게 그만 둘까 몇 번이나 세 번이나 그러다가 일제시대에 뭐 의사면허가 있으면 밥을 먹으니까 내 마음대로 월급을 타서 뭘 할 수 있다 하고 버틴거지. 그러니까 입학성적은 2등인가 했는데, 나올 적에는 아마 뭐 꼴지... (웃음).
그러니까 전쟁말기라 일본 갈 것도 막막하고, 입학은 뭐 2등인데 졸업은 꼴지라든가 해서 성적도 안되겠다 그랬거든. 일본유학을 포기하고 나니 안과는 하기 싫은데 월급을 주니까 안과에 있으면서 정신분열증에 관한 책을 읽고 있으니까 구주대학 정신과에 갔다가 돌아온 일인(日人) 1년 선배 한 사람이 지나 가다가 “아 당신 정신과 관심이 있군” 하기에 그렇다고 대답해 놓고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지.
그런데 전문학교는 정신과가 없거든. 일제시대 내과교수가 강의만 하는 거야. 난 3학년 때 뮌헨대학 주임교수 Kolle의 독일어로 된 교과서를 흥미있게 읽었어. 당시의 경향에 비해 Kolle는 아주 새로운 좀 역동적 이론을 갖고 있고 그걸 1938년 나온 새 교과서에 담았는데 그걸 내가 주문해 읽었다고.
그런데 그 선배가 한번 정신과가 어떤지 구경이라도 해보라 이런 거야. 1942년이었지. 일제시대 경성제대라면 식민지대학이라는 정도 이상으로는 생각 안했거든. 그래 그럼 뭐 성대 정신과 한번 구경하러 가보자면서 구경하러 올라 왔다가 말이야 정신과를 하게 된 거야 우연히. 그러니까 인자 의사를 한다 하면 정신과 밖에 할 게 없다 이거야 말하자면, 내가 인문 사회과학에 관심이 많으니까.
또 정신치료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어. 학생 때 나보다 5년 나이 많은 친구가 여자도 잘 꼬시고 뭐 이렇게 무드를 조성한답시고 일종의 일상생활의 최면술에 관심을 가졌었는데 그 Kolle 교과서에 그런 게 있어요. ‘일상생활에서의 최면’ 이라고 그걸로 인자 의사를 한다면 정신과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거야.
(신경정신의학회보 1월호에 실린 사진을 보여주며) 여기 있는 임문빈이가 그 당시에 의국장이고 그 전까진 일본 조수들과 의사들이 있다가 다 불려갔단 말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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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숙 |
선생님께서 1942년 처음 정신과를 시작하셨을 때 우리나라 정신의학의 수준은 어느 정도였으며 수련, 치료, 연구기관 등에 관해서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
이동식 |
그러니까 정신과하는 건 경성제대 의학부 정신과 거기밖에 없었다구. 한국 전체에 정신병원도 서울 밖에 없고. 그러니까 경성제대 부속병원 정신과, 하라병원(청량리 뇌병원의 전신), 하라병원은 박영효가 일본 망명가서 하라란 일본여자하고 사이에서 난 아들이 의사로서 원장을 했지. 고다마라는 국립정신병원 전신으로 노량진에 일본 한지의사가 하는 정신병원이 있고, 성북동 여기 성북병원이라고 구주제대 출신 조교수였던 일본인하고 명주완, 이세연(이문기선생 엄친) 등 셋이 합자를 해가지고 세운 것이 있었어. 교육기관은 경성제대 정신과 뿐 이었고 개인병원은 고다마하고 하라 그리고 소화16년(1941년)에 개업한 성북병원, 그 셋이 서울에 있었고 그 밖에는 없었지. |
김행숙 |
선생님께서 처음에 정신과 공부하시면서 히스테리의 최면술을 연구하실 때 혼자서 깨우치신 걸로 저희들은 알고 있는데... |
이동식 |
그러니까 그 때는 교과서라 해 봤자 Kolle하고, Bleuler, Kretschmer 등 튀빙겐 대학이 조금 dynamic한 편이었고 보통은 그저 organic oriented 돼 있었으며 psychogenic한거 별로 인정 안 한단 말야. 노이로제, 물론 그런게 약간 있긴 있어도. 그러니까 뭐 교수고 조교수고 아무도 정신치료에 대해서 모르는 거라. 그러니 Kronfeld라고 독일 사람이 쓴 정신치료, 거기에 최면술이든지 정신분석이다 하는게 있어 책을 보고 내가 히스테리 환자에게 최면술을 걸었더니, 완전히 이게 flexibilitas cerea 라서... 사람이 완전히 이게 요렇게 하면 요대로 있고......
그러니까 두 환자를 봤는데 두 번째는 이렇게 탁 보기만 해도 됐어. 그 당시에 독일정신의학, 신경정신잡지에 최면술을 걸어서 암시를 하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동전을 놓고 이게 지금 달아 작열하고 있다, 이렇게 암시를 주면 화상이 생기는 이런 것도 사진에 나오고...... |
김행숙 |
1954년에 미국으로 가셔서 4년 동안 주로 정신분석에 대해 연구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
이동식 |
정신분석만 한 게 아니라 레지던트 수련을 2년 받고 또 할 거 없다고 그러니까 appointment 취소하고 주립정신병원에 2년 근무하고... 뉴욕에 있을 적에.... |
김행숙 |
예, 그 당시에 미국으로 가실 때의 기대와 4년 뒤의 결과, 그리고 미국생활에 대한 평가 등을 좀 말씀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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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
그러니까 우린 환자가 적으니까, 그 당시에는 정신과의사 10년을 해도 진전섬망 환자를 전혀 볼 수가 없었다고. 아, 그런데 뉴욕 벨뷰병원에서는 하루 저녁에 진전섬망 환자가 80명씩 밤에 입원하드라구. 매일, 저녁 때 되면 말야. 그러니까 병동은 9층 건물인데 정신과 병동이 한 20개 돼요. 그러니까 뭐 오만 종류의 환자를 다 볼 수 있었어. neurologic disease가 있고 mental disorder가 있는데 신경과의사하고 정신과의사가 같이 보며 또 내과병동이 있는데 정신이상이다 하면 내과의사하고 정신과의사가 같이 보고, 뭐 알콜중독자 또 prisoner라고 정신감정병동이 있거든. 거기는 일개 경찰서가 와 있어. 첫 문은 경관이 열어주고, 서장이 있고, 그 다음에 간호원이 열어 주는 문이 따로 또 있는 2중으로 경비가... 정신감정하는 사람은 전부 거기에. 소아정신과도 있었는데 Lauretta Bender가 과장이었지.
그러니까 한국서는 사례가 적었지만 거기서는 다양하고, 풍부한 임상경험이 가능했지. 그러니까 본래는 정신분석 공부하러 갔는데 그런 정신분석은 물론 supervisor에 analyst들이 orthodox, neofreudian 등 다 있었지. 또 미국사회가 어떻다 하면서 미국을 가 본 사람들도 미국사회를 잘 모르더라고. 왜냐하면 이미 한국에서 미국에 대한 망상을 형성해 가지고 미국 왔기 때문에 눈앞에 있는 것도 안 본다 이거야.
한 예를 든다면 말이야, 우리 후밴데 모 대학 학장 하던. 친구가 내과하는데 나보다 일년 먼저 미국에 와 있었지. 이렇게 신문 같은 거 쌓아놓고 파는 무인판매대를 보고 미국엔 도둑도 없고 지상천국이라고 그것을 미국의 전부로 알더군. “하지만 어제 너 신문 안봤나. 어제 신문에 FBI 통계가 강도가 몇 건이고 말야, 무슨 빈집털이가 몇 건이고, 무슨 살인... 뭐 이런 좍... 범죄가 얼마나 많은데 그런 소리 하느냐. 나는 여기 오니까 대뜸 모든 직원이 나보고 말이야 도둑을 조심하라고 하더군, 처음부터. 그러니까 병동을 잠가 놨는데 그 안에 있는 의사실에 청진기라든지 책을 두지 말라고 미국의사가 나보고 그래. 그리고 간호원도 말아야 절대 청진기나 이런 거 두지 말라고. 그러니까 외국 사람이니까 가르쳐 주는 거지. 그리고 내 혼자 자는 방에 청소하는 여자가 말야, 절대 방에 귀중품을 두지 말라. 이렇게 모든 사람이 도적을 조심하라, 이런데 넌 왜 그런 소리 하느냐”고 해도 못 알아듣더군.
2년 후에 내가 구라파학회에 갈 적에 그 친구가 날 만나자마자 누구한테 도적맞은 얘길 하더라구. 미국에 도적 없다 하던 바로 그 친구가 그 동안에 모 대학 연구실에서 책을 몇 백불, 학생이 틀림없이 가져갔다는 거야. 또 자기 부인하고, 부인이 여의사인데, 둘이 사는 아파트에 뭐 카메라다 양복이다 다 잃어 버렸다고...
언제 가져갔는지 모른다 이거야. 평소에 안 쓰는 거 여름 같으면 겨울 양복 가져가고. 그러니 뭐 언제 도둑맞은 지도 모른다. 나보고 대뜸 도둑맞았다는 거야. 난 미국에 있는 동안에 admitting office에 타임지 두고 온 것, 그것밖에 도둑맞은 게 없다구.
그러니까 그게 전혀 현실을 바로 못 본다 이거야. 가만 보니까 미국 올려고 애쓰는 동안에 한국을 하도 나쁘게 보고 미국은 아주 미화해 가지고 이미 미국 오기 전에 미국에 대한 그런 것이 형성돼 있더라구. 가만 보니 모든 사람들이 그러니까 신문기사고 뭐고 그런 게 안 들어오는 거야.
그리고 내가 미국서 한달쯤 생활해 보니. 아! 미국사람은 양심이 없구나. 이런 결론에 도달했어. 그래서 한국의사나 미국의사한테 얘기하면 납득을 안 하드라구. 그러다가 한두 달 지나니 Erich Fromm의 ‘Sane Society'란 책이 나왔어. 그 책 첫머리에 그런게 나와요. 미국 사람은 양심이 없다. 양심이 규칙이나 법률로 externalize돼 있는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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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숙 |
선생님께서는 1958년 귀국하신 뒤 1960년에는 경북의대에 부임하셨고, 5.16 후에는 옥고까지 치르셨는데, 귀국하실 때의 이야기와 이 당시 우리나라 사회 상황과 정신의학계의 상황 등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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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
미국서 58년 여름에 Queen Elizabeth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넜고 런던까지 기차를 타고 갔는데 앵글로 색슨이라는 것이 아주 특징적으로 말이 많아요. 누구든지 그저 만나면 막 지껄이고 돌아서면 뭐 금방 말 걸고 말야. 한국 사람은 그것을 친절한 걸로 착각하지만 그게 아니라 불안하니까 그런거야. 그 사람들은 말을 안하면 불안하단 말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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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가지고 국제 World federation for mental health 제11차 회의를 윈대학에서 하고, 바르셀로나로 가서 제5회 세계정신치료학회, 로마에 가서 제1차 세계정신약물학회의 international collegium에 참석하고, 베니스 관광하다 보니 세계철학자대회를 섬에서 한다 그래서 내가 배타고 가서 등록비도 안내고 참석했어. 그러니까 국제학회 넷을 내가 참석했거든. 58년 돌아오면서 보니까 아하! 서양 사람들 신통치 않다 라는 이런 결론이 났어.
미국에 있을 적에 정신분석연구소에서 듀봐 코라라고 하버드대학 여자 인류학교수의 강의를 들었는데 비교문명론을 말하면서 마지막 시간에 미국 문명에 대해서 하는데, 하기 전에 말야 10여분 동안 introduction에서 자기가 미국 대학에서 미국 문명론을 강의해본 적이 없다고 설명하더군. 미국 사람은 자기 문화에 대한 비판을 나쁜 비판도 아닌데 못견딘다는 거야. 청중이 뭐 다 30살 넘은 사람들인데, 미리 준비를 해서 10여분 준비를 해서 하는데도 한 2-3분 하니까 장내에 살기가 흐르더라구. 그러니까 역시 거기서도 강의를 못했다구. 구라파나 한국 이런 데는 국가와 개인 관계 이외 친구 친척이다, 여러 가지 supportive한 관계가 많거든. 그런데 미국 사람은 국가가 유일한 support라 이거야. 그러니까 미국에 대한 비판은 생명의 줄을 끊는 거다 이거야. 내가 볼 때 그러니까 미국 사람은 자기나라 문화나 자기 나라 비판을 아주 못견디는 거야. panicky해. 그런 걸 한국 정신과에선 잘 모르잖아.
한국 정신과의사 뿐만 아니라, 미국 유학한 사람들, 그리고 내가 그 뭐 therapeutic community 있지... 영국 출신인 미국서 정신과의사 하는 사람하고 워싱턴에서 정신분석 하는 사람과 같이 therapeutic community를 창시한 사람 (Maxwell Jones) 만났거든. 그래 워싱턴의 분석가가 그를 보고 왜 여기서는 스칸디나비아 출신 사회치료사를 썼느냐고 물으니 그 친구가 내 얼굴을 슬쩍 보면서 동양 사람은 모르지만 미국사람이나 영국여자는 간호원으로서 부적당하다. 스칸디나비아 여자들은 다르다고 대답하더군. 그러니까 확실히 다르거든. 처음 만났는데 뭐 금방 아주 친한 사람처럼 카페테리아인데 내 먹을 밥을 갖다 주더라고. 안내하면서 얘기하는 것도 아주 간격이 없단 말야. 대화가 잘 된단 말야. 미국사람, 영국사람, 항상 간격이 있단 말야. 상대방 대하는데 벽이 있어. 그래서 내가... 워싱턴 사람에게 미국사람은 양심이 externalize돼 있단 말이야 뭐 이런 소리 하니까 그 사람도 그 참 이상하다고 말하더군. 말하자면 주차금지 표시가 없는데 주차를 했대. 자기가 렌트카를 갖고 구라파를 운전하고 여행하는데 런던서 그랬더니 순경이 와서 왜 그런데 주차하느냐 하더라는 거야. 구라파나 동양서는 개인 재량에 맡겨지는 부분이 많단 말야. 양심에. 미국서는 말하자면 규칙과 법률에 위반만 안되면 모두 무슨 짓을 해도 좋다, 이거야.
그러나 구라파나 동양은 안 그렇다...라는 것이 증명이 되고. 그리고 그 철학자대회 가보니 우리는 그저 상식적으로 아는걸 뭐... 서양 사람은 심각하게 말이지, 철학적인 무슨... 그리고 세계정신치료학회에서도 보면 미국사람 보단 구라파 사람이 좀 더 성숙이 됐고, 중국 사람은 그 보다 또. 한국 문화가 최고 수준에 있다 하는 결론을 가지고 58년 말에 귀국, 59년 여기 수도의대에 2월 달인가 왔는데, 유석진씨가 매주 사례발표회를 하고 있다고 나오라 그래. 나가보니까 말야 이게 중요한 얘긴데, 환자 얘길 하는데 환자 얘기가 아니라 얘기하는 사람의 자기 생각 말하자면 망상이다 이거야. 환자하고 관계없는 투사다... 이것을 갈 때마다 내가 지적했더니 내가 참석하고 뭐 두 세 번짼가 하고는 꺼져 버렸어. 갈 때 마다 지적을 하니 이게 회의가 성립이 안돼. 지금도 대부분 그 구별을 잘 몰라요. ‘도는 뭐냐’ 하는 거 봤지. 생각을 없애는 거. 전부 자기생각이다 이거야. 뭐 정신치료 토론하는 것도 보면 말야. 생각이 없어야 간격이 없어야 바로 내가 거울이 되어 상대방 사람이든지 사물이 바로 비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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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숙 |
네, 선생님께서 1964년 사상계에 발표하셔서 지적 충격을 주신 ‘독재사상과 패배의식’에 대해 그 논문이 나오게 된 배경과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 등을 좀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이동식 |
‘내부독재와 패배주의’라고 돼 있지. 내가 붙인 제목은 그게 아닌데, 편집부에서 그렇게 잘 붙였어. 장준하씨가 그걸 가지고 두 달 연속 권두언으로 썼다구. ‘패배의식을 극복하자’는 것이 그 당시 대학교수들의 주요 관심사였지. 임원택씨가 이 달의 논조를 소개하는데... 지금도 동아일보 찾아보면, 제일 큰 활자로 말야 ‘독재사상 은 패배의식에서’라고 말이지 그러니까 내부독재,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억압하는 사람이 남을 억압한다.... |
김행숙 |
선생님께서 서울대학교 교실에 계실 때에 같은 의국에서 근무하시던 김동순 선생님 과 결혼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김선생님과의 첫 만남과 로맨스에 대해서 자 세히 말씀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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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
무슨 뭘, 그런걸... 그건 뭐 별로 뭐. |
김행숙 |
저희는... 선생님 그래도.... 그리고 선생님의 가족들에 대해서 소개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
이동식 |
우리 부모님, 아들은... 딸 너이 하난 한국에 있고, 둘은 미국에 있고, 하난 파리에 있고, 손녀는 중학교 1학년.... |
- 분과 단체가 많을수록 학회는 발전한다 - |
김행숙 |
선생님께서는 1940년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창립에 참여하시고 1965년에는 회장직을 역임하셨는데, 당시의 정신과 학회활동과 그 외에 학회와의 관련된 이야기들을 좀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이동식 |
내가 59년 초에 돌아오니까 환영회 한다고 말야 모여가지고 그 석상에서 최신해씨가 대한민국에서 군대에 안 나간 사람 뭐 어떻게 해야 된다 그런 소릴 하길래, 자넨 군대에 안 나갈려고 애쓰다가 할 수 없어서 말이야 군대에 가 가지고, 말하자면 유석진이 얘기 들으면 출근도 잘 안하고 말이야, 자기 개인 병원이나 보고 그렇다 하는데 앞으로 우리 학회를 정화를 해야 된다고 했지. 그 때 내가 ‘정화’란 말을 썼다구. 59년 초에 학회 정화. 그런 탁한 공기를... 아직까지 지금 30년 이상 돼도.... 이 정화라는 것, 그게 어려운 거야.... |
김행숙 |
선생님께선 1974년 한국정신치료학회 전신인 한국정신치료사례연구회를 창립하셔서 지금까지 이끌어 오셨는데 이 학회활동에 관해서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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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
정동철 선생이 군의관으로 있고, 그 때 김상태 선생도 군의관인가? 김광일 교수가 서울대학 전공의로 있을 때야. 그 즈음 이부영 교수가 돌아와서... 내가 처음에는 학회라는 것 보다 말이지... 내가 그 때 서울대학 학생지도연구소 consultant로(62년부터 72년까지) 있었는데... 60 몇 년인가... 서울대학 정신과하고 돌아가면서 사례발표회하자 이랬거든, 남명석 선생도 있고 한동세도 있고.... 그러자 한동세가 우리가 무엇 때문에 심리학자하고 동석하느냐... 안 할라고 해. 그래서 이부영 선생이 나와서 정신치료 사례발표회를 하자 이래 가지고 서울대학 학생지도연구소에서 한 두번 했나? 그런데 공연히... 그 때 김광일이 전공의로 있을 땐데... 방해공작이 들어왔다구. 못하게 압력을... 두 번하고 그래가지고 정동철이 대학 다방에서... 정동철이는 국민학교 아동도 과외공부 하는데 다 큰 전문의가 말야 꼭 자기 교수한테만 배워야겠느냐, 지하로 공부합시다 했는데 그게 아주 없어졌어. 지금도 그 압력이 강해서 공부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이... 눈치 보느라고 많다는데. 우리가 뭐 학회에서도 말야, 밤낮 무슨 팔공정신의학회, 정신치료학회... 뭐 해산해야 된다,,,, 그런 소리가 밤낮 들리더라고. 그런데 그게 말하자면 병적이다....
나는 돌아와서 59년에 학회 임원으로 있을 적에 newsletter를 통해 각자 회원들의 의견을 서로 반영을 시켜야 한다... 서클도 많이 만들고 노는 서클, 공부하는 서 클 그 뭐 다 끼리끼리... 그런 게 많아야 학회 전체로서 발전을 하지... 학회 하나 가지고는 평의원하고 회장, 부회장 외에 딴사람은 아무 참여 못하고... 이런 게 오래 계속 된 거야. 그래 newsletter에 ‘나의 제언’하는 걸 옛날에 내가 만들어 가지고 자꾸 그리했지. 단체가 많을수록 발전하는 거야. 그러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외에는 아무런 단체도 인정 않으면... 그게 괜히 불안해하는 거라. 세력, 공부가 아니라 power로 착각하고. 그러니까 power motive 많은 사람이 남에게는 그런 것 없는데도 그렇게 해석을 해서 위협을 느낀다 이거야. 그래서 자꾸 그런 눈치가 보이길래, 이부영이 보고도 너 분석심리학회 따로 만들고 나보고 회원 되라 하면 되어줄 수 있다고 말했지. 그게 간단한 거야. 그게 공부를 하자하는 게 아니라 무슨 power... neurotic한 그것 때문에 제대로 안 되는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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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숙 |
이 밖에 선생님께서 관여하시는 국내외 여러 학회활동과 진행 중이신 연구 분야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
이동식 |
그게 뭐 내가 도와 정신분석, 정신치료, 그걸 가지고 1976년부터 국제학회에서 지금 까지 17회 이상 해 가지고... 잡지가 나왔지. 이제 그 책이 인정이 될라하는 단계 야. 처음에 남 안 하는 거 하면 누구든지 오랜 시일이 걸린다고. 근데 76년에 처음 파리에서 그걸 보고했는데 지금 서양사람 잡지에 났으니 14년이나 걸렸어. 여기에 내 것하고, 정창용, 강석헌.... 여기 나와 있지. (The Tao psychoanalysis and existential thought 이동식, Training and development of psychotherapy in Korea 강석헌) |
김행숙 |
선생님의 학위 논문인 ‘한국인 정신치료에 관한 연구’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으면 좋 겠습니다. |
이동식 |
내가 뭐 어떻게 해 가지고 말야... 학위가 없는데, 모두 그게 없다 하니까 안 믿고 말이야, 가짜 박사 한 10년... 학위가 없는데 ‘박사’ 캐쌓고 말이야. 그래서 서울대학에 미생물 이성훈 교수가 아 빨리 뭐 해버려야 된다고 말이야. 그래서 그때 권이혁씨가 대학원 교무과장으로 있을 때 하기로 돼 있었는데, 한 친구가 내가 서울대학에 뭐 18년이나 있었는데 그 학생지도연구소에 있은 것은 전임이 아니라고 틀어서, 권이혁씨가 경북의대 학장 한 우리 후배한테 부탁을 해가지고... 뭐 내가 부탁도 안 했는데 본인 자신이 말이야 경북대학에서 해라.... 이래 가지고 경북대학에서 학위를 받았지. 원래 서울대학에서 하기로 돼 있었는데 (웃음). 그래도 그 논문 쓰는 데는 이근후 교수가 많이 거들어줬지, 통계자료를. |
김행숙 |
선생님께서 불교, 유교, 노자, 장자 등의 연구를 처음 시작하신 것은 언제부터 인지요? |
이동식 |
미국서 돌아와서야. 일제시대부터 한국 사람들이 일본 사람 영향을 받아가지고 서양 것, 외국 것만 의존하고 말이야, 그래서 내가 문리대 법문학 교정에서 철학하는 김교수하고 5000년 문화가 아무 것도 없을 턱이 있나 라는 말 등을 나누었지. 그런 걸 서양적인 과학적인 용어로 번역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다가 1954년 노스웨스트로 미국 가는 길에, 여름에 앵커리지에서 기착하는데, 70 먹은 캐나디언 영감이 내 옆자리 와 비어 있느냐 그래, 그렇다 하니 중국에서 왔냐, 아니다 Korea라고 하니, 아 Korea China Same하고 말이지...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 뉴욕 간다 하니 앞으로 미국에 Tao가 유행할거다. United State is like a tall building without foundation. 높이 올라갈수록 붕괴할 위험이 증대한다 이거야. 장차 미국에 도가 지배할 것이다.... 그런데 내 물어보니 조상은 독일인인데 카나다에.
그런데 서양 사람을 보니까 더 있을 필요가 없다 이래가지고 말이야, 그래서 돌아와서.... 그래 한국 사람들은 지금도 그런 사람이 많지만 도다 우리문화라 하는 건 전혀 돌아보지 않는 풍토니까. 지금도 혼자 하는 게 많지만 혼자 이게 잘 안되잖아. 그러다가 인자 그 역경 일을 하는 사람이, 교련 부회장하는 사람이 우울증에 걸려가지고... 베드로병원 갔는데 부원장이 나한테 가봐라 해서 이 분을 치료하던 중 이 사람이 밤낮 대혜선사의 서장을 보고 난 한문도 잘 모르는데 읽다가 나한테 질문을 해요. 그래서 한국말로 번역 해봐라 말야. 그러니까 질문에 대답하다가 보니 불교는 말하자면 정신치료고 그 핵심은 집착을 없애는 거다. 이래가지고 동대 총장하던 조명기씨한테 (내 일제시대부터 알고, 경성제대에 있었어. 종교사회학 조수...) 불교 공부를 좀 할 강사를 소개하라, 그래 가지고 공부를 해보니 이게 서양분석보다 궁극적인 정신치료다 이런 결론에 도달했지. 참선에서의 각(覺)의 과정을 표현한 십우도(十牛圖)로 보면 서양분석 치료로는 망우존인(忘牛存人) 이상은 못간다... 그건 말하자면 자기집착에서 못 벗어나 있다 이거야. 자기집착을 벗어나야 최고 경지에 간다.... 뭐 이걸 내가 분명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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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숙 |
1970년 한국철학회에서 ‘도의 현대적 의의’라는 강연을 하신 것이 선생님께서 도에 관해 처음 발표하신 것인
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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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
그렇지. 아니 그전에 했지. 그전에 ‘한국에 있어서 정신치료 카운셀링의 철학적 정서 (서설) (6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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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숙 |
68년에요? |
이동식 |
그건 왜냐하면, 정원식 전 문교장관(현 총리)이 한 때 학생지도연구소에 조교수로 있었거든. 거기서 김기석 교수가 알선해 가지고 미국 가서 박사 해 갖고 왔는데 ... 당시 한국 카운셀러협회 친구들이 영 우리 것을 모른다 말야. 그러니까 동 양엔 카운셀링의 철학이 없으니까 서양에서 카운셀링 철학을 도입해야 된다... 해 서 특별강연을 했어. 근대 정원식 교수 뿐만 아니라 우리 정신과교수도 다 그렇다고. 말하자면 나한테 배웠으면 굉장한 세계적인 수준에 가 있을 텐데, 외국 것 찾다가 보니 말이야 이건 뭐 아무 것도 없다구. 저... 저... 누구냐. 이부영하고 말이지. 누구지? 이상복이, 둘이서 1959년 4월에 명륜동, 내가 수도의대 있을 때 명륜동 우리 집에 찾아 왔더라구. 갓 인턴 돼 가지고, 그 전엔 몰랐는데 사상계에 쓴 글보고 말야 와 가지곤 둘이 말이야. 대한민국에 선생님 밖에 배울 선생이 없으니 앞으로 잘 지도해 달라... 뭐 나한테 지도 받은 게 있어야지. 대구서 학회하고 오면서 이부영 교수하고 열차식당에 우리 집사람하고 저녁 먹으러 가는데 우종인하고 전공의들 있더라구. 전공의들 붙들고 이부영이도 옆에 있는데, 이상복이 하고 둘이 59년 4월에 나를 찾아와 나 밖에 배울 사람이 없다고 했는데 배운 게 하나도 없다고. 내가 한국정신의학의 정맥인데 느그들 정맥에서 벗어났다고 말했지. |
김행숙 |
1989년에 나온 ‘현대인의 정신건강’이란 저서에서 선생님께선 ‘버려야 얻을 수 있다’ 는 주제 아래 세상 사람들은 노이로제적인 욕구로 마음속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사물을 바로 보지 않는다고 쓰셨고 그 밖의 저서인 ‘현대인의 노이로제’, ‘노이로제의 이해와 치료’ 등 노이로제에 대해 특히 깊은 관심을 보여주시고 있는데 이에 대해 좀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이동식 |
아 그것은 어떠냐 하면 옛날에 쓴 글이야. 십 몇 년전에 불광, 광덕스님이 불광이란 잡지를 내는데 꼭 글을 좀 써 달라.... 광덕이도 그 전에 학회에 초청해서 정신과의사 앞에서 강연시켰어. 서울대학 옛날 건물, 강당에서 선에 대해서 말야. 그러니까 원고료 지불할 돈도 그 당시엔 없었고... 지금은 신도가 굉장히 많다는데.... 그래서 내가 보시로 써 준거야 원고료 안 받고. 처음엔 잡지를 원고료 대신에 갖다 주고 몇 해 하다가 돈 생기니까 그 후부터는 원고료를 받았지만. 노이로제가 뭐냐 이거야? |
김행숙 |
그냥 선생님 저서에 대해서 좀 소개,,, 그리고 노이로제도,,, |
이동식 |
그게 그러니까 잡지에 원고용지 16-17매 그 때 그 때 쓴 것이 한 반쯤 되지. 나머지 반을 금년 초에 또... 그게 잘 팔리니까, 지금 준비 중인데 체계적으로 쓰면 더 좋은 데 그 때 그 때 바쁜 시간에... |
김행숙 |
그래도 여러 사람들이 꾸준히 읽고 도움을 많이 받아.... |
이동식 |
가정주부들한테 제일 인기가 있대. |
김행숙 |
선생님은 평소에 서양의 정신분석은 신경증적인 불안을 없앨 수는 있지만 존재론적인 즉, 정상적인 불안은 없앨 수 없다, 그런 한계를 가졌다고 말씀하셨고,,, |
이동식 |
그건 내가 인용한거야. 폴 틸리히라고, 죽었지만 하버드대학의 신학철학교수로 유 명해. 우리나라에도 몇 년 전 번역책 광고에 그 책을 봤어. 그걸 내가 인용한거야. 인용하니까 물론 나도 같은 견해다 이거지. |
김행숙 |
도는 불안 없이 죽음을 받아들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정신분석은 자기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
있지만, 도야말로 궁극적인 최고의 정신치료라고 말씀하셨는데 도와 정신치료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이동식 |
밤낮 내가 이야기 한 것이지. 그러니까 도나 정신치료나 말하자면 정신분석도 투 사... 석가모니가 깨달은 핵심이 불취외상(不取外相) 자심반조(自心返照) 자기 눈 에 보이는 자기 자신이나 타인상, 세계를 취하지 말라, 그건 착각이다, 이거야. 그것 을 취하지 말고 자기 마음을 돌이켜 비추어라, 조명하라, 이거야. 말하자면 자기가 깨닫지 못한 자기 마음이 투사 된 것이 외상이다. 자기나 타인이나 세계... 그러 니까 투사를 없앤다, 그것이 도나 정신분석의 근본핵심이다. 투사는 자기가 깨닫지 못한 자기 마음, 욕심에서 나온 거지. 의존심, 사랑 받고자 하는, 적개심 등등... 그런데 자기집착이 아직 있으면 이게 또 망상을 만들어 내고 자기 집착이 끊어지면 있는 그대로가 나타난다.... |
김행숙 |
선생님의 인생관과 세계관에 대해서 묻고 싶습니다. |
이동식 |
그게... 보통 통속적인 질문이야 (웃음). |
김행숙 |
신경정신의학회 활동에 대해 하시고 싶은 말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
이동식 |
내가 볼 적에는 우리나라가 아직 임상정신의학도 확실하게 안 잡혀있는 것 같아. 왜냐하면 교수들이 훌륭한 교수한테 다년간 지도를 받아야 되는데 그것이 없다 이거야. 전부 외국 가서 레지던트하고.... 우리나라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단계가 다 그런데 외국의 권위, 권위를 따르면 아무 것도 없어진다.... 그러니까 나는 어릴 때부터 권위를 무조건 따르지 않는다.... 그러니까 Freud나 누구든지 얘기하면 자기가 그 걸 알아들었을 적에 그건 벌써 Freud를 떠나서 그게 진리니까, Freud 것이기도 하지만 내 것 이기도 하고 네 것 내 것 없는.... 진리는 어떤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깨달은 사람은 똑 같다 이거야. 그렇게 공부를 해야 하는데 껍데기만 하니까 나중에 가서 자긴 껍데기 밖에 안 남는다 이거야. 그건 모든 방면에.... 지금 정신의학뿐만 아니라 다 그렇잖아요! 그래 내가 하는 거하고 다른 사람 하는 것이 정 반대지, 모든 게. 어때요? 아니, 내가 글을 쓴다든지 말할려면 딴 사람은 다 엉뚱한 생각하고 있는데 딴 소리 할려니 아주 영 힘들다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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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전에도 고희기념학술 그것도 말이야, 거기 비용을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들이었으니 국제 뭐 한다하면 우리가 돈 대주고... 풍토가 이렇게 돼 있드라구. 그 자기 비용으로 오는데... 돈이 있거든... 그러니까 너무 하는 게 아니냐, 이런다구. 그 사람들은 우리한테 이렇게 배울려고 왔는데.... 합동 강연은 내가 그럼 너그들 좀 뭐 해라 해가지고 그 사람들도 하고... 어때요! 정반대 아녜요. 응!
무슨 정신분석학회니 뭐 다 비싼 돈 들여 가지고 말야, 회원들 불러 가지고 여비주고 돈 주고 말야, 나는 앉아서 지금 구라파, 미국의 뭐뭐 다 지금 돼 있는데... 3년반 전부터 말야. 세계정신분석 그 논문 써달라고.... 지금 아직도 못 썼는데. 그게 간단히 쓸 수 있는데... 우리나라 이걸 어떻게 쓰나, 이러고 있다구. 우리나라 실정을 어떻게... 이런 얘기를 쓰나 마나...지금 (웃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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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숙 |
선생님은 한국의 정신의학 특히 정신치료가 어떻게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이동식 |
그거야 뭐, 그 있잖아! 내가 세계정신치료를 통합한다... 그런데 내가 처음부터 그런 거지만, 요새 나한테 미국, 구라파에서 편지가 오는데, 지금 미국 쪽에도 integration of psychotherapy 잡지도 나오고... 그 때 봤지! 회원들 논문 보낸 것. 얼마 전에도 구라파에서도 정신치료 통합단체가 열려 가지고 여름에 학회 한 번 했지. 세계적으 로 그런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어.
그런데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이라든지 대만 일본 인도 등 비서양권에서 자꾸 서양에 매달려 간단 말이야. 잘 소화도 못하고. 이런 상태거든! 중국 사람은 우리 과거처럼 지금 자꾸 서양 흉내 내는데 바쁘고. 우리 후배가 한국에서 나하고 뜻을 같이 해서 한다면 전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것이 될 수가 있는데, 그게 문제야! 정창용도 American academy 갔다 왔잖아. 여기 비디오도 전부 다는 안 비쳐도 거기서 비치고 했다더군. 정창용이도 그러고 김해암한테 편지도 받고. 그래서 앞으로 더 책을 내고 또 학회에서 하는... 그것도 내가 있어서 그런 게 가능한.... 내 혼자 가지고는 안되고 또 내가 없으면 그게 어렵다 이거야. 응! 내 혼자 가지고도 안 되는 거고. |
김행숙 |
선생님께선 평소에 많은 별명을 갖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중 특히 어떤 별명을 듣기를 좋아하시는지요? |
이동식 |
뭐 그런게 없지. 그런 것 듣기 좋아한다 하면 그게 자기집착이 많은 거지 (웃음), 별명이 많지. 수도의대 있을 적에 교수들이 나보고 ‘신의’라 그랬어. 1959년. 왜냐하면 각과 교수가 해도 안 되는 다 죽어 가는 환자를 내가 금방 살린 경우가 몇 번 있었거든. 그래서 그 이재규라고 방사선과 하다가 죽었는데 그 아들이 지금 연세대학 내과교수로 있지, 원장실에서 말야, 박춘자라고 재단이사장 보고... 이교수가 홧병을 잘 고치는 신의라고 신의! (웃음) 그 내과 유교수는 무슨, 무슨 방법으로 고쳤느냐고 말야. 그래서 내가 그 의사시보에 연재를 했거든. 정신과 치료했지 뭐. 잘 읽어 보라구. 내가..... |
김행숙 |
그건 고희 논문집에 빠져 있든데요, 그 별명은.... |
이동식 |
응! 빠져있지, 그 외에 많이 있는데. |
김행숙 |
마지막으로 특별히 하시고 싶은 말씀은... |
이동식 |
특별히... 모르지. |
- 언제나 자기반성과 자중자애하는 생활을 하자 - |
김행숙 |
특히,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 |
이동식 |
후배들에게 당부하는 것은 권위를 숭상하지 말라는 거야. 말하자면 권위자라 하는 건 없다 이거지. 전에 최수호가 그 newsletter에 썼잖아. 진리가 권위지 사람이 권위가 아니다. 그러니까 권위자가 되겠다는 사람은 말하자면 권위자에 굴복돼 있는 사람이라 절대 권위자가 될 수가 없단 말이지. 그게 ‘내부독재와 패배의식’에서 얘기한 거나 마찬가지야. 권위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권위에 굴복돼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절대 권위자가 될 수가 없다, 이거야. 된다면 가짜... 진짜 권위자는 진리를 무기로 삼지 않는 사람이 권위자다 이거야. 그런 사람은 진리를 찾지. 진짜 권위자는 권위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는 사람이다. 권위자 되겠단 사람은 가짜 권위자지, 진짜가 아니다.
그러니까 주체적인... 개인생활이나 사회생활이나 학문을 하거나 의사를 하거나 주체적인 자세에서 출발해야 하지. 안그러면 쭉때기로 끝난다. 어때요 나하고 다른 사람하고. 그 전에 어떤 유명한 사람 비서하던 사람이 한두 번 왔는데, 연세대학 내과전공의가 나한테 가보라고 했다고 해서, 뭐라 하드냐고 물었더니 그 양반 아주 꽉 차 있다고 꽉 차 있는 사람이라고 이렇게 평하더라고... 그러니까 누구 말이라도 자기가 확실하다 하기 전에는 믿으면 안된다 이거야. 자기가 확실하게 되면 부처가 말하든 공자가 말하든 누가 말하든 그것은 이미 그 사람의 말이 아니고 바로 또 내 말이 된다 이거야, 그것은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는 개인의 소유가 아니고 깨달은 사람은 다 똑같다... |
김행숙 |
선생님과 같이 있는 것 그 자체가 치료라고 말하는 분도 많이 있는데 저 자신도 그 이야기에 깊은 공감을 가졌습니다. 벌써 긴 시간 흘렀습니다만... |
이동식 |
(웃음) 긴 시간... 두 시간도 안됐어. |
김행숙 |
선생님 도움 되는 말씀을 더 주시면... |
이동식 |
자기가 의문이 있어 가지고 물어야지 생생한 뭐가 되지. 뭐든지 물어봐! 궁금한 것. 그러니까 아까 말한 그 것, 생각을 없앤다 하는 이론과 현실, 정신치료학회 오래 한 사람은 전부 알지만 일반적으로 우리 정신과의사들이 잘 몰라. 정신과의사 뿐만 아니라 철학 교수들도... 그러니까 인근 사회과학 교수들은 세미나하면 불러.
당신네들은 말하자면 책을 쓰든지 논문을 쓰든지 뭘 할 때 그것이 현실경제나 정치에 도움이 안돼도 그걸로써 다 가치를 인정받지만 정신치료는 환자가 낫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니까 차원이 다르다, 이거지. 말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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