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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우도

동·서(東ㆍ西) 정신치료의 통합(統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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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566회 작성일 22-12-26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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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8월 4일 서울 호텔소피텔앰배서더에서 한국정신치료학회와 미국정신분석학회(American Academy of Psychoanalysis)가 합동으로 개최한 「소암 이동식 선생 고희기념 정신치료 학술대회」에서 이동식 선생님께서 하셨던 〈소암 선생 기념 강연: 'The Integration of East and West Psychotherapy'〉의 강연 원고를 최태진 회원(2004년 현재 한국정신치료학회부회장)이 한글로 번역한 글입니다.
소암 이동식선생고희기념논문집인 「도(道)와 정신치료(精神治療)」의 pp.369-374에는 한글번역본이, pp.375-380에는 영문원고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영문 원고는 본 학회 영문자료집묶음 pp63-67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동·서(東ㆍ西) 정신치료의 통합(統合)

이동식(李東植)


존경(尊敬)하는 내빈(來賓) 여러분, 미국 정신분석학회(精神分析學會) 회원 여러분, 그리고 한국 정신치료학회 회원 여러분! 안녕(安寧)하십니까?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을 모시고 제가 70년(年) 인생(人生)과 정신과(精神科) 의사(醫師)로서의 48년 경험(經驗)의 결정(結晶)을 모아 총결산의 강연(講演)을 하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榮光)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일제(日帝) 점령하(占領下), 1919년(年) 3·1 운동(運動) 2년후(年後)에 우리 집안의 장손(長孫)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현재까지 저를 괴롭혀 오고 있는 것은 우리 동포( 同胞)들이 외국이나 외국문화(外國文化)를 숭상하고 한국(韓國)이나 한국문화(韓國文化)를 말살(抹殺)하는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2차(次) 대전(大戰)이 진행 중인 1942년(年)에 정신과(精神科)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일본(日本)은 한국(韓國)의 모든 분야(分野)에 지도적(指導的)인 위치를 점령하고 있었고 정신과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서울 밖에는 정신병원(精神病院)이 없고 공립(公立) 정신병원(精神病院)이란 것은 당시 경성제대(京城帝大) 의학부(醫學部) 부속병원(附屬病院) 밖에 없었고 서울 시내(市內)에만 세군데 개인(個人) 정신병원(精神病院)이 있었는데 침상(寢牀)이 200을 약간 상회할 정도밖에 안됐습니다. 대학에는 한 사람의 한국교수(韓國敎授)도 없었습니다.

일본(日本) 정신의학(精神醫學)은 Kraepelin 전통의 기질적(器質的) 독일(獨逸) 정신의학이었습니다. 저는 주로 독일문헌(獨逸文獻), 개인적으로는 영국(英國), 미국(美國), 불란서(佛蘭西) 정신의학을 공부(工夫)했습니다. 그 당시 지배적인 정신의학의 조류는 기질적인(氣質的)인 경향(傾向)이었습니다. 신경증(神經症)의 원인을 유전적 또는 체질적(體質的) 변질(變質)에 있다고 보았으며 Eugen Bleuler나 Ernst Kretschmer, 나중에 내가 새로운 교과서로 본 1938년의 Kurt Kolle는 예외였지만 그 외에는 대부분이 기질정신의학 입장이었습니다. 저는 Freud 나 Janet, Charcot 등의 영향을 받고 또 본래 어릴 적부터 제가 가지고 있는 그런 개인적인 통찰(通察)로 해서 대부분의 정신장애의 원인은 정서적(情緖的)인 것이다 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에 인간의 불행이란 감정처리를 잘못하는 데서 오고, 감정처리를 잘 하는데서 행복이 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진실(眞實)과 위선(僞善)에 대해서 예민하게 지각(知覺)을 했고 이웃 어른들로부터 “인생을 환히 안다” “중 같다” 이런 말을 들었으며, 변명(辨明)이나 후회(後悔), 복수(復讐)를 하지 않았습니다. 대구의전(大邱醫專)을 다닐 적에 학생으로서 장차 정치가(政治家), 신문기자(新聞記者), 교육자(敎育者), 종교인(宗敎人) 이런 직업을 해야 되는데, 그 중에 교육자가 내 적성에 맞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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