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치료자라는 외길로 온 나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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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552회 작성일 22-12-26 16:41본문
※ 2006년 3월 25일 서울에서 있었던 한국정신치료학회 2006년도 제1차 학술연찬회 ‘정신치료 활성화를 위한 연찬회–정신치료자로서 지나온 길–’에서 이동식선생님께서 발표하신 글입니다.
정신치료자라는 외길로 온 나의 발자취
이 동 식(한국정신치료학회 명예회장)
나는 1921년 7월 26일에 경북 칠곡군 왜관읍의 소농의 장손(長孫)으로 태어났다. 형이 있었다고 하나 크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어머니로부터 들었다. 형은 호적에도 없다. 우리 집은 할아버지 윗대는 경남 동래에서 살았고 친척들이 거기서 살았고 외가도 그 근처였다. 증조부는 제물포에서 무역에 종사했다고 들었다. 증조모는 체격이 건장하고 키가 크고 일인 유지도 무서워했다. 대가족이라 고모가 둘, 삼촌이 둘, 머슴, 소 한 두 마리, 머슴들 부엌일 도와주는 사람, 큰 고모는 일찍 시집가고 큰 고모부도 평생 다정한 얼굴로 나를 대해 주었다.
어려서 기억은 증조모를 위시하여 조부모, 삼촌들, 고모들, 머슴들, 이웃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 했다. 어머니는 물론 나에게 헌신적이었고, 단지 아버지와의 접촉이 제일 적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독자라서인지 14살에 18살인 어머니와 결혼해서 16살에 나를 봐서 열적어서 그런지 아버지 노릇을 하는 것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점에서 나의 첫 기억이 상징적이다. 사랑방에서 아버지의 친구 몇이 아버지가 누워있는데 배위에 나를 안아서 올려놓고 아버지가 안아주게 하는데, 우리 아버지는 반갑게 안아주지 못하고 열적어해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좀 커서는 마당에서 아버지가 멀리서 사시(斜視)로 나를 쳐다보는 모습도 나의 뇌리에 박혀있다. 이것도 아버지로서의 아들에 대한 애정을 제대로 표시 못하는 것을 알 수 있는 정경(情景)이다. 5세경 같은데, 나보다 두 살 아래인 여동생이 오빠라면서 나를 쳐다보는 눈에서 전달되는 전폭적인 사랑과 신뢰의 느낌은 평생 나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있다. 이 동생은 곧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호적에도 없다. 이 느낌은 1952년경 대구 피난 중에 그때 세살정도인 아들과 집에서 600미터 거리에 같이 나갔다가 이때는 음료수라는 것이 기껏해야 미군에서 나온 분유를 물에 탄 것을 마시라고 사주었더니 저는 안마시고 나에게 권하길래 도로 주어 마시게 했는데 그 마음이 여동생이 나를 쳐다보는 마음과 더불어 인간의 순수한, 타인에 대한 사랑과 배려로써 내 마음에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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